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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의 생애

by 리원준 2022. 12. 15.

스위스의 교육학자 및 사상가였던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독일어 : Johann Heinrich Pestalozzi, 1746년 1월 12일 ~ 1827년 2월 17일) 그는 고아들의 대부이며, 아이들의 교육에 조건 없이 사랑을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였습니다. 19세기 이전부터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는 이미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삼아 간주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의 어린 시절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 아버지인 '요한 바프티스트'와 그의 어머니 '수잔나' 사이에 출생하였고, 계몽사에서 출판한 어린이그림위인전기 [페스탈로치]에 의하면 할아버지가 손수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합니다.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에서 요한은 신약성서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언자인 세례자 성 요한에서 따왔고, 하인리히는 그 당시에 교회를 보호하던 군주 하인리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의인이었던 '요한 바프티스트'는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가 5세가 되던 해에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는 사회적 약자층에 대한 관심 및 배려를 실천하는 따듯한 가정환경에서 길러졌고, 개신교의 목사인 할아버지는 손주와 산책을 하며 교우를 만나게 되면 '잘 지내십니까?'라고 물으며 빈곤한 교우들에게도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두 아이를 혼자 돌보는 와중에도 틈틈이 음식과 옷을 고아원으로 보냈습니다. 세상을 떠난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 아버지 '요한 바프티스트'도 가난한 사람을 주로 진료하고는 하였습니다. 어린 시절에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는 건강이 좋지 못하였지만, 할아버지와 자주 산책을 통해 건강을 회복 및 자신감도 기르게 되었습니다.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의 교육을 받을 당시에 노동과 학업을 병행하여 성적은 그리 좋지 못하였으나, 취리히에 있는 취리히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교에 재학 중 사회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고, 활동 중 만난 '안나'와 1969년 결혼을 하였습니다. 노이호츠에서 20명 정도 되는 아이들과 낮에는 농사, 밤에는 공부를 하는 공동 야학을 열었지만 주위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로 실패하였습니다. 이 일을 계기고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는 무일푼이 됨과 동시에 건강도 나빠지게 되었는데, 이때 아내 '안나'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가정부 바벨리 외에는 없었습니다. 1798년 정부의 요청으로 고아원의 책임자가 되었고, 1799년 폐쇄될 때까지 고아원이 운영되었습니다. 그 후 학교를 설립해 자신의 교육관을 실천하였고, 세상을 떠날 때도 아이들이 임종을 지키며, 아이들이 뛰어놀다 다칠 것을 우려하여 유리조각을 주웠을 정도로 그는 사랑의 화신이었습니다.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 사상은 '가정은 도덕성의 학교다.' 였는데 그는 가정에서의 인성교육은 중요하고, 가정의 단란함은 가장 빛나는 기쁨이며, 자녀를 보는 즐거움은 가장 거룩한 즐거움이라고 여겼습니다. 또한 가진 것이 없는 것은 하나님에게 모든 의지할 수 있는 것이고, 마음이 겸허하기 때문에 가난하면 감격하기를 잘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가진 것 없고 항상 부족하게 생활하는 자체가 가난한 이를 겸허하게, 감격하게 하는 것이고 건강한 몸을 가진 이가 아니고서는 조국에 봉사하는 사람이 되긴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곧 좋은 부모, 지식, 형제, 이웃이 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본인 뿐 아니라 식구를 위해 더 나아가 이웃 및 조국을 위해서도 건강해야 하고, 고귀한 지혜를 소유한 이라도 본인에게 순수한 인격이 없다면, 어두운 그늘에 둘러싸이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천한 오막살이라도 교육된 인격은 순수 및 기품 있는 위대함을 발산함을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교육을 사회 개혁을 위한 수단이라고 했습니다.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는 182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교육사상가로 활동하며, [은자의 황혼(1780년)], [린하르트와 게르트루트(1781년 ~ 1787년)]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그는 '아이는 작은 어른이 아니고, 고유의 세계가 있는 인격체'라고 주장했는데, 아이를 작은 어른으로 보아 아이의 개성을 멸시하던 사람의 교육관을 바꾸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는 아이를 교육할 때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 사상은 유럽 사회에 영향을 주게 되어 독일의 프로이센 군주가 찾아올 정도였습니다.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는 1805년 이베르돈에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20년간 이베르돈은 20년간 유럽 전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825년 이베르돈을 떠나 부르크의 집으로 돌아가 [백조의 노래]란 자서전을 집필하였는데, 그 내용은 '생활을 도야한다'라는 명제에 종래 교육 사상이 통일적으로 전부 서술되어 있습니다.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는 자신의 불운한 유년기를 기억하며, 고아들을 데려가 조건 없이 교육하였으며, 19세기 이전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한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이번 포스팅 내용은 본인의 불행한 유년기를 겪게 하지 않기 위해서 많은 불행한 아이에게 지식을 교육한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의 생애 중 유년기와 교육관, 사상, 집필한 자서전을 알아보는 글이었습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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